Zechariah 12:1

"The Lord, who stretches out the heavens, who lays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who forms the spirit of man within him, declares:" - Zechariah 12:1

Thursday, May 23, 2013

위대하지 않지만 위대한 『위대한 개츠비』, 번역가 김석희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극장가에 바람을 일으키고, 서점가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 『위대한 개츠비』로 들썩이고 있다. 고전문학작품으로는 흔치 않게 베스트셀러 차트에 진입하고, 영화 개봉을 즈음해 수많은 번역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90년 전에 출간되었던 책이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가이자 『로마인 이야기』, 『프랑스 중위의 여자』, 『모비딕』 등 까다로운 원작의 맛을 살리는 유려한 번역으로 유명한 김석희에게  『위대한 개츠비』의 매력과 번역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먼저 듣고 싶다.
『위대한 개츠비』는 스콧 피츠제럴드라는 미국 작가가 쓴 장편 소설이다. 192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개츠비라는 한 남자가 성공과 부를 얻고 사랑하는 여자까지 차지하려고 발버둥치다가 허망하게 죽음을 맞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전(古典)은 어렵기 때문에 고전(苦戰)이라는 우스개도 있지만, 이 소설은 청소년도 즐겨 읽을 만큼 평이한데도 ‘20세기 100대 영문소설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부끄럽지만 이번에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었다. 그런데 정말 어렵지가 않더라.
『위대한 개츠비』의 스토리는 어려운 게 없다. 내용도 연애, 졸부들, 화려한 파티, 치정극과 살인까지, 이것만 보면 완전히 통속소설이다. 하지만 통속소설을 벗어난 작품을 썼다는 것이 바로 피츠제럴드의 문학성이다.
 
세간의 베스트셀러 작품은 대부분 문학 외적 흥미나 시대성만으로 화제가 되었다가 곧 사라져버린다. 반면에 예술작품으로 높은 평판을 얻은 소설은 반드시 시대성과 영원성의 교차점에서 창조된다. 『위대한 개츠비』도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성을 그리면서 그 안에 인간의 욕망과 좌절이라는 영원성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시대성에서 영원성을 이끌어내고, 그 영원성 덕분에 언제 다시 읽어도 신선하다. 그게 고전의 매력이다.
  
저자인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피츠제럴드는 천부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다. 소년 시절부터 1차 대전에 참전해 군대에 있을 때에도 꾸준히 글을 쓸 정도로 문학적 열정과 자부심도 높았다. 하지만 24살에 발표한 첫 장편 『낙원의 이편』의 성공으로 갑자기 유명인이 되면서 유명세에 휘둘리고 또 아내를 제대로 못 만나서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삶을 개츠비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가의 삶과 행태가 투영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피츠제럴드 자신이 체험하거나 관찰할 것을 토대로 작품을 쓰는 타입의 작가였다. 이 작품을 구상했을 때, 그는 작품의 무대이자 배경인 롱아일랜드의 흥청망청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집필에 들어가면서 그런 생활 방식에 대한 반성과 회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그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고 결국 롱아일랜드를 떠나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공간적 거리를 확보하고 나자, 원래는 자신의 분신이었던 개츠비에 대해서 관찰자로서의 객관적 시선을 보낼 수 있었고, 개츠비를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로 그려낼 수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에게서 개츠비를, 즉 출세했지만 천박한 속물을 보았다. 그런 개츠비와 결별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죽일 수 밖에 없다. 작가가 소설 속 주인공을 죽이는 것은 두 가지 경우 때문이다. 질투와 증오. 피츠제럴드가 개츠비를 죽인 건 두 가지 모두 때문일 것이다. 개츠비가 죽어야만 작가인 피츠제럴드 자신은 구원받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피츠제럴드는 재기하는데 실패했다. 개츠비는 죽었지만 개츠비보다 더한 속물인 데이지, 데이지보다 더 속물인 아내 젤다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화려한 삶을 살고 싶어한 젤다는 피츠제럴드에게는 끊임없이 돈을 벌라고 재촉했고, 피츠제럴드는 깊이있는 작품보다는 돈이 되는 단편소설들을 써내며 재능을 고갈시키고 결국은 삶의 에너지도 고갈되어 44세라는 한창 나이에 일찍 삶을 마감하게 된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1974)와 《위대한 개츠비》(2013)
 
『위대한 개츠비』는 지금에야 20세기의 고전으로 인정받지만, 막상 출간 당시에는 완전히 묻혀버렸다고 들었다.
1925년에 초판으로 2만부를 찍고 곧 8천부를 증쇄했는데, 작가가 죽었을 때(1940)까지 재고가 2만부 쌓여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위대한 개츠비』에 담긴 비극성은 무시되고 시대성만 부각되었던 것 같다. 『낙원의 이편』을 읽고 열광한 독자들은 아직도 그에게 비슷한 후속작을 기대했다는 것, 피츠제럴드는 아직 서른도 안된 젊은이였고 그래서 그에게 고전다운 걸작을 기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런데 그는 예술적 성취를 이룬 획기적인 작품을 쓰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생긴 괴리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는 시대를 거역한, 그래서 시대를 앞선 소설이 되었고, 젊은 독자층에게는 당시 그 내용이 어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다시 재평가 받게 된 배경도 궁금하다.
피츠제럴드에 대해서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 학계나 진지한 평단에서는 동시대 작가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보다 한 수 아래로 보는 게 보통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이 깊지 못하다는 평가와 관련이 있는데, 미국에서는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청소년 소설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학이 전공자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또 독자 없는 작품이 존재 가치가 있겠는가. 문학의 성패를 누가 판단하느냐란 문제까지 들어가면 굉장히 복잡해지지만 연구자나 평론자가 논문을 많이 써낸다고 더 좋은 작품인 것은 아니다. 헤밍웨이나 포크너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제외하면 지금은 거의 없지만, 『위대한 개츠비』는 지금도 계속 읽히며 새로운 독자들을 만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개츠비』가 매력적인 것이다.
  
최근 『위대한 개츠비』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갑자기 『위대한 개츠비』의 각종 번역본이 쏟아져 오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최근 영화 개봉을 앞두고 판매가 괜찮은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이 있다. 번역에는 이런 번역도 있고 저런 번역도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번역이 정본처럼 광고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 출판사에서 번역 제안이 왔을 때는 몇 차례 거절을 했지만 번역계의 원로급이 되어서 제대로 번역된 책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자는 심정으로 뛰어들었다. 보통 이 책 정도의 분량(원고지 800)이면 번역에 한 달 정도 걸리는데 이 책에는 두 달을 매달렸다. 그만큼 공을 들이고 신경을 많이 썼다.
 
지금까지는 번역에 대해서 대리번역, 짜깁기번역 같은 것들만 문제 삼았는데, 이제는 제대로 된 번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때가 되었다. 그런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계기를 만든 것 같아 번역하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든다.
 
번역을 할 때는 어떤 것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는가?
문학작품, 특히 뛰어난 소설 작품은 스토리가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문체의 힘이 남다르고 뛰어나기 때문에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이청춘과 이문구의 소설을 읽으며 서로 다른 문체의 글맛을 즐기듯, 미국 독자들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으며 서로 다른 문체를 즐긴다. 그렇다면 번역에서도 그 다름을 독자들이 즐기도록 해줘야 한다. 사실 이런 수준의 번역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원서를 읽으며 문체의 맛을 식별하기도 어렵고 그 맛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10년쯤 100권을 번역한 뒤에야 원서의 글맛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이런 수준에 못 이른 번역자가 자신의 글 버릇대로 옮겨버리면 헤밍웨이도 피츠제럴드도 다 같은 문체로 읽히게 된다. 그건 원서를 죽이는 짓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첫 문장부터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In my younger and more vulnerable years my father gave me some advice that I’ve been turning over in my mind ever since.
내가 지금보다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여리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하나 해 주셨는데, 그 충고를 나는 아직도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한다.
 
vulnerable이라는 단어는 취약한, 연약한, 상처받기 쉬운이라는 의미지만 뒤에 나오는 아버지의 충고 내용을 보면 연약하거나 상처받기 쉬운 것과는 거리가 있어 고심하다 마음도 여리던이라고 번역을 했다. 책의 마지막 문장도 그렇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그래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원문에서는 콤마를 두 개 찍으며 문장을 분절시켰다. 그렇다면 원작자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심리를 이해하면서 번역에서도 이걸 살려서 번역해줘야 한다. 나는 원작과 문장의 어순과 리듬을 맞추기 위해서 문장을 세 부분으로 끊어서 번역을 했다. 이걸우리는 계속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같이 한 문장으로 이어서 번역하면 내용은 전해지겠지만 원작이 갖고 있는 문체의 맛이 사라진다.
 
개츠비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를 묘사한 4장의 첫 문장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또다시 개츠비의 집으로 몰려와 그의 잔디밭을 즐겁게 돌아다녔다란 부분이 있다. 여기서 어중이떠중이들이라고 번역한 원문이 ‘the world and its mistress’이다. 이건 사전에 있는 말이 아니라 피츠제럴드가 만든 말이라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the world and its wife’란 말에서 유추를 했다. 이 말은 원래 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 몰려든 많은 군중이라는 뜻인데, wife mistress(기혼 남자의 정부)로 바뀌었으니 정상적인 부부들이 온 게 아니라는 뉘앙스다. 그래서 이 부분을 어중이떠중이들이라고 표현한 거다. 
 
개츠비의 형씨라는 말버릇도 어떻게 번역되어 나온 말인지 궁금하다.
영어 사전을 보면 ‘old sport’여보게, 자네같이 친근한 사이에서 오가는 호칭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쓰자면 그렇지만 개츠비가 닉에게 자네같은 호칭을 쓰는 건 안 어울리지 않나. 그런데 조사해보니 ‘old sport’라는 말버릇은 피츠제럴드가 롱아일랜드에 살던 시절 같은 주민이었고 밀주업자였던 맥스 캘러그라는 남자가 아무한테나 내뱉는 말버릇에서 차용한 것을 알게 되었다. 개츠비도 맥스 캘러그와 비슷한 인물 아닌가. 그래서 암흑가 냄새가 나는 껄렁껄렁한 말투를 궁리하다 형씨를 찾게 된 것이다.
 

 
데이지를 차지하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간 개츠비는 왜 위대한 개츠비인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에 사로잡히면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이 소설은 개츠비가 왜 위대한가를 쓴 작품이 아니다.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을 쓸 때 ‘great’라는 단어를 제목에 쓰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출간에 임박해서 편집자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도 작가가 제목에 ‘great’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있다.
 
개츠비는 지독한 속물이다. 그런 속물이 밀주업으로 돈을 모아 졸부가 된다. 부자가 된 이유는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흔히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면 가진 것 없이 시작해 출세와 성공을 얻는 걸 말한다. 여기서는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정상의 문제는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인 1920년대는 이미 아메리칸 드림이 끝난 시대였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면서 이제는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세계 무대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제 성공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개츠비의 출세란 기차가 떠나가버린 뒤의 손짓이나 마찬가지다. 개츠비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것이 데이지라는 천박하고 무책임한 여자다. 데이지는 결국 개츠비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great’라는 단어의 반어법이 성립한다. 비아냥거리고 있는 거다. 그러니 ‘Great Gatsby’는 실은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라 대단한 개츠비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놈 참 대단한 녀석이야할 때의 뉘앙스가 담긴 것이다. 개츠비는 출세했지만 결국 속물로 전락했고, 어이없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 비극성, 그것이 이 소설이 성공한 지점이다. 문학은 비극일수록 위대해지니까.
 
『위대한 개츠비』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라면 아무래도 책의 마지막 문장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이 문장을 번역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이 아름다운 문장 때문에 이 소설이 마지막 광휘를 발휘했다고 본다. 개츠비가 죽은 뒤 그 참담한 비극성을 어둠 속에 묻어버렸다면 독자들은 어디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시간과 돈을 들이며 문학에, 나아가 예술에 다가가는 것은 결국은 위안을 얻기 위함이다. 그 위안이 천박한 형태로 나타난다면 오히려 작품을 망칠 수 있지만, 이 아름답고 고상한 문장은 『위대한 개츠비』가 이룬 예술적 성취의 마침표가 된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자로서, 번역을 마친 소감은?
연기자들이 역할에 빠지면 한동안 거기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처럼, 소설을 번역하다 보면 소설의 캐릭터는 어떤 성격일까? 어떤 말투일까? 등등을 굉장히 고민하며 대화를 만들기 때문에 소설의 캐릭터에 나도 모르게 빠지게 된다. 그래서 원고를 넘기고 나서도 불현듯 , 개츠비라는 캐릭터에 이런 면모가 있었구나라는 것들이 떠오른다. 피츠제럴드가 왜 개츠비를 죽였을까 하는 것도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이 미쳤다. 피츠제럴드는 자기 안의 개츠비를 지우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었구나. 그래서 개츠비를 죽인 것은 피츠제럴드에게 또 다른 꿈을 주는 것이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것들이 『위대한 개츠비』가 왜 걸작으로 재평가 받는지, 이 소설의 매력이 무엇인지와도 연결되는 것 같다.
 
 
|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leftfield@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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